2019. 11. 14. 23:20ㆍ후기&리뷰&소개/기타
어릴 적에 디지몬 어드벤처 에피소드 중에서 에테몬을 물리치고 태일이와 코로몬이 현실 세계로 돌아간 에피소드를 봤을 때 정말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게 갑자기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그 에피소드만 찾아봤습니다.
처음엔 몇 화인지도 잘 몰라서 구글에 대강 검색했는데, 저와 비슷하게 해당 에피소드(디지몬 어드벤처 21화)를 인상 깊게 본 사람들이 많은지, 관련 글이 많아서 쉽게 찾을 수 있더라고요. 게다가 21화 동영상은 검색 최우선 순위에 떠 있어서, 덕분에 바로 만화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확실히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아마 이질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에피소드는 디지몬 어드벤처의 다른 에피소드들과는 명백히 다른 색채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늑대아이 등으로 유명한 호소다 마모루가 이 에피소드의 감독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디지몬 어드벤처에서 처음으로 디지털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지, 명백하게 이전의 에피소드들과는 차별화되기 위한 듯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21화에서 등장하는 티라노몬은 쥬라기 공원의 티렉스가 생각날 정도로 무감정하고 무섭게 묘사돼 있습니다.
그 친숙한 아구몬도 여기서는 왠지 파충류 같은 느낌이 듭니다. 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 1기의 괴수 같던 아구몬을 생각하면 이것도 어쩌면 그나마 순화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코로몬과 우가몬과의 전투신에서는 이전에 보지 못한 역동감을 느낄 수 있는데요, 전투 중에 볼레로의 상승음이 울려 퍼짐과 함께 세로축을 동시에 상승하는 화면을 보고 있으면, 이게 지금까지 내가 보던 그 만화와 동일한 만화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많은 사람들이 이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아닐 겁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디지몬 어드벤처는 현실 세계로까지 그 배경을 확장하면서, 이세계로 간 아이들이 악당을 물리친다는 권선징악적 카타르시스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영역에까지 발을 들입니다.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 중 어느 쪽이 사실이며 어느 쪽이 거짓인지 질문을 던지지만, 곧 태일이는 양쪽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하지만 태일이는 한참 고민하면서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금세 잠들어 버립니다.
초등학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생사를 건 모험을 하러 가는 것보다는 익숙한 집에서 부모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편안한 삶을 보내는 것을 택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코로몬도 태일이가, 코로몬 자신은 속하지 않았지만, 하지만 태일이는 속해 있는, 현실 세계에 머무르고 자신만이 디지털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합니다.
그럼에도 결국 태일이는 디지털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내립니다.
여전히 편안한 현실 세계에 머무르고 싶다는 미련이 남지만, 그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태일이가 나리에게 꼭 돌아온다는 약속을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할 일을 마치면 반드시 현실 세계로 돌아갈 것이고, 우리는 그가 그 약속을 결국 지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에피소드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일 겁니다.
어쩌면 이 점이 요즘 범람하는 이세계물이 저한테 와닿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세계물이라는 장르가 요즘 갑자기 범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디지몬은 물론이고 예전에도 이세계물 장르는 많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인공들이 이세계에서 모험을 하는 이유는, 역경을 딛고 성장해 원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는 점이지요. 반면에 요즘 이세계물들은 전부 힘든 현실에서 도피해서 자기 맘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런 현상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마치 현실이 점점 살기 힘들어지고 있고, 그에 맞춰 애니메이션도 예전처럼 현실의 찬란함을 그리는 대신에 현실이란 단지 도피하고 싶은 환경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으로 보여 씁쓸하게 느껴지네요.
https://www.fmkorea.com/1583863315
추가로 21화에 대해서 이런 내용을 발견했는데, 보고 나니 참 심란하네요. 물론 이 내용은 메인 디렉터가 말도 안 된다고 했으며, 호소다 마모루도 이 인터뷰 때문에 질책을 들었다고 하니 정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해당 에피소드를 만든 감독이 이런 말을 한 이상, 해당 에피소드 내에 이런 의도가 없었다고만 주장하기에도 찝찝하네요.
그래서 다시 21화를 돌려봤는데, 인터뷰 내용들을 상기하면서 만화를 봐도 딱히 그런 느낌은 들지 않더군요. 그리고 링크한 글에 올려진 장면들은 호소다 마모루의 인터뷰 내용에 맞게 일부러 짜깁기한 느낌이 들어서, 그 내용에 반하는 21화의 다른 장면들을 몇 개 가져와 봤습니다.
인터뷰 내용과는 달리, 나리와 코로몬 사이에 이상한 기류 같은 건 전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직접 해당 에피소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리는 코로몬으로부터 태일이를 돌려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좋아하는 태일이도, 좋아하는 코로몬도 떠나지 말고 자신과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죠.
감독의 의도가 어떠하였든 간에, 아픈 어린아이가 좋아하는 오빠와 친구가 자신의 곁에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을 묘사한 것을 그런 식으로 확대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저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감독의 인터뷰처럼 이 에피소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굳이 그 인터뷰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호소다 감독에게 인터뷰에 대해 화를 낸 메인 디렉터가 이 에피소드를 방영하기로 한 것은 디렉터 역시 이 에피소드에서 호소다 감독이 언급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일 테고, 메인 디렉터의 의지와 상관없는 내용이 애니메이션에 들어갔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론은 이상한 루머에 휘둘리지 말고 그냥 어린 시절의 추억 그대로 이 에피소드를 해석하면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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