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5일의 마중(Coming Home, 归来guīlái) 줄거리 및 리뷰 - 문화대혁명과 상징 해석을 중심으로

2019. 8. 21. 13:57후기&리뷰&소개/영화

2019.5.5 글


(스포일러 주의!)

개인적으로는 영화 내 요소들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5일의 마중'은 두 번 이상 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좋은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를 미리 본 다음에 리뷰를 보고 다시 한 번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추천합니다.

-줄거리-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중학교 교사 펑완위(공리 분)는 딸 단단(장혜문 분)을 혼자 기르고 있다. 남편인 루옌스(천다오밍 분)는 교수였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반동분자로 몰려 하방 조치(중국에서, 도시의 학생·지식인·기관 간부 등이 농촌으로 가서 노동을 경험하고 대중과 접촉하는 운동)를 받은 바람에 가족과 떨어져 얼굴도 보지 못한 지 10년이 넘었다.

 

어느 날, 루옌스가 도망쳤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펑완위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도망친 루옌스가 집으로 돌아오지만 펑완위는 집 문을 열어주지 않고, 단단은 아빠를 밀고한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 펑완위는 기차역으로 루옌스를 만나러 가지만, 단단의 밀고를 받은 공산당원들이 나타나 루옌스를 끌고 간다.

 

3년 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루옌스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펑완위는 루옌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루옌스를 팡 아저씨라고 부르며 밀쳐낸다.

 

펑완위는 루옌스가 ‘5일에 돌아가겠다’고 부친 편지를 받고 매달 5일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차역으로 루옌스를 마중 나간다.

네이버 포스터

‘5일의 마중‘은 중국의 5세대 영화감독을 대표하는 장예모 감독이 연출했고, 중국의 국민배우들인 공리와 천다오밍(진도명)이 남녀 주인공을 맡은 영화이다. 필자는 이전에 장예모 감독의 영화 중에서 ‘영웅(2002)’, ‘황후화‘, ‘그레이트 월’을 보았는데, 그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이 세 영화의 공통점은 ‘영상미는 돋보이지만 서사가 아쉬운 영화’로 그의 필모 중에서 별로 호평받지 못하는 영화들이다. 반면에 ‘5일의 마중’은 영상미도 훌륭하지만, 인물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되며 관객이 배우들의 감정에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스토리에 있어서도 무난하게 좋은 영화이다. 그래서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 장예모 감독의 이름을 봤을 때는 저 세 영화의 감독과 동일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애틋한 두 사람의 관계

‘5일의 마중’은 얼핏 보면 기억장애를 가지고 과거 속에서만 사는 아내와 헌신적으로 아내를 돌보는 남편의 아름다운 순애보를 다룬 영화로 볼 수 있다. 겉보기에 이 영화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사건을 시대적 배경으로만 사용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기보다는 인물 간의 관계와 그들의 감정선을 묘사하는데 신경을 쓴 영화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감독은 영화 내의 요소들을 통한 은유법으로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루옌스

루옌스는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하방을 당한 지식인들을 상징한다. 루옌스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지만, 문혁이 시작되면서 반동분자로 몰려 하방 조치를 당한다. 문혁이 끝나고 루옌스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만 그는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내는 그를 주위의 좋은 사람으로는 받아들이지만 그를 침실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마음 깊은 곳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루옌스는 딸이 자신을 밀고한 것을 받아들이지만(자신에 반대하는 행동을 받아들임), 딸은 아빠가 엄마에게 어떻게 생각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그의 지식인으로서의 위치를 인정할 생각이 없다)

영화 마지막에 루옌스가 펑완위의 옆에서 돌아올 수 없는 자신을 기다리는 모습은, 하방 당한 지식인들이 문혁이 끝나고 가지고 돌아오지 못한 가치가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펑완위

펑완위는 체제에 순응한 지식인을 상징한다. 그녀 역시 루옌스와 마찬가지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고 문혁이 옳지 않은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체제에 순응을 하고 문혁 체제하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지식인들과 다르게 처벌을 받은 것을 처벌을 받은 지식인들에게 책망받을까 두려워한다. 그녀는 루옌스(도움을 요청하러 온 옛 지식인 동료)를 외면한다. 이내 그것을 후회하고 그것을 돌이키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다.

펑완위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것 역시 두려워한다. 문혁이 흑역사로 치부되고 문혁으로 쫓겨난 지식인들이 다시 돌아왔지만 자신은 그들을 마주 볼 자신이 없다. 이에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게 된 펑완위는 심인성 기억장애로 인해 과거에 갇혀 살게 된다. 루옌스와 팡 아저씨를 동일시하는 펑완위의 모습은 문혁 때 펑완위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팡 아저씨처럼 지금은 루옌스가 펑완위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펑완위는 루옌스의 상냥한 손길이 오히려 죄책감 때문에 아프다.

펑완위의 기억장애가 기차역에 넘어져 머리를 다쳤기 때문이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영화에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은, 그녀의 기억장애를 루옌스를 다시 마주하였을 때의 두려움을 견딜 수 없던 펑완위가 스스로 자신을 과거의 감옥 속에 가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피아노, 사진 등의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들을 통해서 펑완위는 과거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지만, 그녀는 그것을 거부한다. 매달 5일마다 펑완위가 닫힌 철창살 뒤에서 ‘루옌스’를 기다리는 모습은 마치 그녀가 죄책감이라는 감옥 속에서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펑완위는 자신이 기다리는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다. 작중에서 그녀는 ‘루옌스’의 이름도 쓰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예전에 적었던 활자를 보고 따라 쓸 뿐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가치, 대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매달 5일마다 기차역에 나가서 무언가를 기다릴 뿐이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서 있지만 동시에 단절된 상태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펑완위와 루옌스가 기차역 문의 철창살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채 ‘루옌스’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그들 부부가 각자 기다리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한 공간에서 같은 이름을 한 대상을 기다리지만, 그와 동시에 단절되어 있다. 루옌스와 펑완위가 기다리는 ‘루옌스’는 이름은 같을지 몰라도 같은 대상이 아니다.

 

단단

단단은 문혁 이전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이후만을 아는 세대로, 과거에 중국이 가지고 있던 가치를 잊고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중국인을 상징한다.

단단은 아빠가 하방을 당하기 전에 원했던 대로 무용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현재 그녀가 맡고 싶어 하는 역할은 3살 때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게 만들어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게 만든 공산당의 프로파간다를 선전하는 양판희 중 ‘홍색 낭자군’의 주연 우칭화이다. 그녀는 문화의 상징인 무용을 하지만,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무용이 목적이 아닌, 문혁으로 대표되는 체제의 선전도구로서의 무용을 한다.

자신의 아빠가 어릴 때 헤어진 자신에 대해서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단단은 오히려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아빠를 미워할 뿐이다. 그녀는 아빠의 바람대로 무용을 하지만 그를 위해서 아빠를 밀고한다.

그녀는 문혁이 끝나고도 아빠를 이해할 생각이 없다. 단단은 아빠가 자신의 위치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다만 엄마를 보살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단단은 아빠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들의 관계 회복(실제로 관계가 회복된다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루옌스는 끝까지 펑완위와 단단이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은 루옌스와 단단이 서로를 이해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개념으로 막연히 이뤄질 뿐이다. 단단은 문혁이 끝나고도 여전히 우칭화 역할의 춤을 완벽하게 추고 이를 자랑스러워하며 루옌스는 그것을 굳은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다.

팡 아저씨

팡 아저씨는 문혁 아래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남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다. 이러한 팡 아저씨의 모습은 마치 문혁 동안 전횡을 일삼은 4인방을 연상시킨다.(팡 아저씨의 '팡'과 4인방의 '방'의 발음의 유사성에서 감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중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현재 중국은 문혁을 일으킨 마오의 권위를 기반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통치되고 있으며, 문혁으로 발생한 모든 잘못은 4인방에게 떠넘기고 있다. 4인방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문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원망하는 대상이라고 말해지지만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팡 아저씨도 영화 내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 역시 문혁이 끝나자 잡혀갔고, 표출할 대상이 사라진 루옌스의 분노는 갈 곳을 잃고 해소되지 못 한다.

여기서 의아한 점이, 영화에서는 루옌스가 잡혀간 것과 마찬가지로 팡 아저씨가 잡혀감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옌스는 팡 아저씨 아내의 절규를 듣고 조용히 돌아 나오는데, 이는 마치 ‘그들 역시 대가를 치르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으니 용서하자’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마치 이는 힘든 시절은 이미 지나갔으니, 각자 알아서 상처를 치유하고, 더 이상 그에 대해 논하지 말자는 의미로 보인다. 기득권에 편입된 장예모 감독이 국가권력에 뭔가 눈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필자는 이 장면에서 감독이 무작정 시대적 원망이 해소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기보다는, 해소되지 않고 갈 길을 잃은 루옌스의 분노를 통해 감독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분명 문혁은 긍정적으로 보기는 힘든 사건이지만, 문혁 이전의 중국 사회는 일반 민중 사이에서 분명 개선이 필요한 사회였다. 소수의 권력 다툼으로 시작된 문혁의 바람이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그렇게 중국 전체로 퍼진 것을 보면, 당시 중국 사회 전반적으로 불만이 가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독도 문혁의 대의는 인정하고, 문혁이 끝난 현재 그것의 과오를 들쑤셔 봐야 좋지 않다는 점에는 공감하지만, 그로 인해 갈 길을 잃은 분노와 치유되지 못한 상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루옌스의 모습을 통해 되묻고 있는 것이다.

장예모는 집으로 돌아왔는가?

중국 포스터

영화의 한국 제목 ‘5일의 마중’보다는 영어 제목 ’Coming Home‘이 원제의 뉘앙스를 잘 표현하고 있다. 영화의 원제는 ‘归来 guīlái’ 즉, ’돌아오다‘라는 의미인데, ’누가‘ 돌아오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루옌스가 집으로 돌아오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루옌스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는 ’루옌스‘가 돌아와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눈이 내리는 기차역에서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루옌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늙은 펑완위의 모습은 문혁으로 인한 상처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문혁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 문화적 파괴 등과 개개인의 수많은 불행이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펑완위는 아직도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가야 한다. 루옌스 역시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 '루옌스'라는 자신의 이름이 쓰인 푯말을 들고 서서 문혁 때 떠난 또 다른 자신 '루옌스'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루옌스’는 누구일까? 문혁으로 인해 하방을 당한 지식인들이 돌아오는 것으로는 안 되는 것일까? 현재의 중국은 문혁 이전의 중국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영화에서도 루옌스가 돌아왔지만, 펑완위는 그를 거부한다. 펑완위가 보기에 루옌스는 중국인이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다. 아마 펑완위가 기다리는 대상은 문혁 이전에는 존재했지만, 문혁으로 인해 중국이 잃어버린 어떤 가치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중화인민공화국 혁명의 초기에 중국인들이 이루고자 했던 혁명 정신에 깃든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펑완위는 현재 기억장애를 겪고 있고, 자신들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다만 자신은 계속해서 그것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만 기억할 뿐이다.

중국은 문혁이 지나는 동안 ‘루옌스’로 상징되는 그들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렸다. 작중 ‘홍색낭자군’에서 나오는 가사, “대해를 항해하는 건 조타수에게 달려있고 만물의 생장은 태양에 달려있지요. 비와 이슬이 내리면 벼가 튼튼해지고 혁명은 마오쩌둥 주석의 사상에 따라야 하지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은 문혁 동안 마오라는 조타수에게 항해를 맡기고, 마오의 사상 외에 다른 것은 잊어버렸다.

 

왼쪽-단단 역의 장혜문/오른쪽-장예모 감독

사실 펑완위가 기다리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영화를 찍은 장예모 감독도 모를지도 모른다. 하방과 귀향이라는 주제는 감독 자신이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과거에 3년간 농장에서 일했고 7년간 방직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감독은, 루옌스가 상징하는 하방 당한 지식인에 포함되어 있다. 루옌스는 펑완위 옆에 같이 서서 ‘루옌스’를 기다리지만, 자신과 팻말에 쓰여 있는 루옌스는 다른 대상이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른다. 다만 루옌스는 자신이 이전에는 가지고 있었지만 과거에 놓고 온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다. 감독도 루옌스처럼 자신이 놓고 온 무언가를 아직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장예모 감독도 루옌스와 마찬가지로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여담)

장예모 감독에 의해 짜인 영화의 장면들은 하나하나가 아름답다.

예를 들어, 펑완위와 루옌스가 기차역에서 서로의 이름을 연달아 부르는 장면에서는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 훌륭하여 둘의 감정에 이입하지 않고 버틸 수는 없었다. 둘의 절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손 하나 잡아 보지 못하고 시대적 배경에 의해 둘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장면은 너무나도 슬퍼서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햇살을 받으며 피아노를 치는 루옌스

특히,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펑완위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훌륭하다. 따뜻하고 밝은 햇살이 루옌스와 펑완위의 얼굴을 번갈아 비추고, 둘의 감정이 상승하면서 교차되는 순간에는, 절제된 감정선 속에서도 감동의 눈물이 볼을 따라 흐른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면의 색이 전환되면서 펑의 표정이 변화하고 루의 눈동자가 떨어지는 장면은 관객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장예모 감독이 왜 중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인지 알 수 있었다. 혹시 ‘5일의 마중’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다면 꼭 한번은 볼 것을 추천한다.

평점 ●●●●○(4.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