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2019. 8. 21. 13:36후기&리뷰&소개/영화

2019.2.19 글


(여러 마블 영화와 관련한 스포일러 주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히어로 대중 영화이지만 여러 개의 무거운 철학적 주제들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따라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본 흥행 영화의 줄거리에 대한 내용을 다루기보다는다는, 이 리뷰에서는 이 영화가 던지는 여러 주제에 대해서 다뤄보겠습니다.

 

참고로 이 글 쓰면서 어벤''스가 아니라 어벤''스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맞지만, 수입할 때 어벤''스라고 수입하는 바람에 어벤스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본문에는 전부 어벤''스로 통일했습니다.

 

1. 큰 힘을 가진 개인을 국가 등의 단체가 통제해야 하는가?

 

저는 '플라톤' '철인정치'를 지지합니다. '로버트 달'에 따르면, 현대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통치하는 능력에서 큰 차이가 없으므로, 따라서 모든 이들은 스스로를 통치함에 있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기본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통치하는 능력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부분이 과연 옳은 전제인지 일단 의문이 생깁니다. 분명 세상에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는 '중우정치'라는 큰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리더십은 부재하게 되고 사회는 혼란스러워집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는 '간접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간접 민주주의 체제 역시 대표들이 선출되기 위해 대중의 환심을 사려고 하므로 중우정치의 폐단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듭니다. 모두가 정치적으로 평등한 민주주의 하에서는 결국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이끌 필요성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누가' 사회를 이끌어 나갈지는 쉽게 정할 수가 없습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 '이데아를 가진 자'이지만, 일반 대중들은 어떤 사람이 이데아를 가진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통치하는 능력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캡틴과 아이언맨으로 대표되는 생각의 대립이 발생합니다. 캡틴은 처음에는 '개인은 국가에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미국을 수호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개인의 자유는 누구에 의해서도 통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의 변화를 겪고 자유라는 미국의 가치를 수호하는 인물로 변화합니다. 반대로 아이언맨은 '뛰어난 개인은 통제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큰 힘을 가진 개인은 통제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쪽의 생각이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개인은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한계를 벗어나는 행동은 사회 내에서 통제될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내에서 표현되는 '어벤저스'는 선의를 가지고 행동하지만 그들 역시 항상 그들의 한계에 마주하고 그들의 행동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결국 사고를 일으킵니다. 설사 마주한 한계를 극복하더라도 다시 새로운 한계와 마주합니다. 자신의 힘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개인은 통제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힘을 가진 개인을 통제하는 사람들 역시 결국 한계를 가진 개인들일 뿐입니다. 어벤저스를 통제하려고 하는 'UN' '어벤저스1' '윈터 솔저' 등의 영화를 보면 완벽한 집단이 아니며, 오히려 '대의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소의 희생'을 빌미로 어벤저스의 '대의'를 위협하는 이중적인 모습도 보입니다. 또한 소코비아 협정 장면에서 UN을 대표하는 '썬더볼트 로스' UN이 어벤저스를 압박하는 빌미 중 하나인 '헐크'를 만들어낸 책임자입니다. UN이 말하는 대의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에 부합하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인선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듯이 어벤저스와 UN 둘 다 '이상적인 정의'의 측면에서 보면 잘못된 집단이죠. 양쪽의 대의는 둘 다 정당한 면이 있지만, 동시에 둘 다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어떤 정의가 옳은 것인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시빌 워는 이 주제와 관련해 아쉬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저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큰 힘을 가진 개인을 국가 등의 단체가 통제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했고 영화에서 그것에 대한 히어로들 간의 갈등과 고뇌를 영화의 주요 포인트로 잡고 영화를 전개할 것이라고 기대했고, 그에 대해 과연 영웅들이 각자 어떤 해답을 내릴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소코비아 협정'으로 대표되는 주제와 관련한 질문은 영화가 전개되면서 흐지부지되고 영화는 대답을 회피합니다. 물론 소코비아 협정이 쓸모없는 영화적 장치인 것은 아닙니다. 협정이 영화 전개에 중요한 요소가 되고 주요 인물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되는 것은 맞지만, 협정과 관련한 주제가 결국 흐지부지된 이유는 이와 관련한 인물들마다의 고뇌, 세상과의 갈등 등을 영화 내에서 풀어나가기 힘들기 때문에 내용 전개를 회피한 것으로 보이네요.

 

2. 타인에 의해 조종당해 범죄를 저지른 개인은 잘못이 있는가?

 

강압적인 명령으로 인해 학살을 벌인 보통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위협을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 목숨에 대한 위협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위협에 굴복해 살인을 저지른 이들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영화 내에서는 여기서 더 극단적인 설정을 더해 개인의 정신을 단어 몇 개만으로 완전히 조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버키'는 원래 캡틴이 슈퍼 혈청을 맞기 이전에 롤모델로 생각할 만큼 정의로웠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정의로운 사람이 세뇌를 당해 살인을 저질렀는데, 이건 그의 의지가 아닌 행동이었기 때문에 그는 무죄일까요? 그렇다면 남은 유족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원망을 쏟아낼 대상이 필요하지만 이미 '하이드라'는 실체가 없는 과거의 조직입니다. 그리고 유족들의 눈앞에는 버키라는 직접적인 원수가 서 있고 그들은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 상황을 가정해보죠. A,B,C 세 사람이 있을 때, A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B A에 손에 총을 쥐여주고 B A의 손가락을 움직여 C에게 총을 쏴 C를 죽였다는 상황을 가정해 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인 이 경우 C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A에게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A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A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버키도 마찬가지입니다. 버키는 본래의 의식이 아니라 세뇌를 당한 상태였고, 그의 살인은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벌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 그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의식도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또한 버키는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서 계속 괴로워합니다. 그가 의식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저지른 살인의 기억들은 그를 놓아주질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버키 역시 하이드라에 의한 피해자일 것입니다.

 

주인의 명령에 의해 사람을 죽인 개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여기서 살인의 직접적인 책임자는 물론 주인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람을 죽인 에게도 안락사 같은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사람인 ‘버키’는 ’와 다를까요버키가 사람이기 때문에 동물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해도 뭔가 조치를 취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요

 

사람은 나면서부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는 동물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판단력을 갖지 못 한 어린아이를 붙잡아서 버키처럼 살인 병기로 만든 경우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세뇌당해 살인병기로 성장한 아이는 살인을 저지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살인 역시 세뇌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찌 보면 지하드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도 어릴 때부터 종교적 세뇌를 당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용서받을 권리가 있는 것일까요?

 

영화의 완벽한 세뇌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현실에서 발생한 적이 없기에 이와 관련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정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개인이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그가 어떤 사건의 원인이라면 그 사건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을까요?

 

-버키의 선공-

사실 영화 내의 묘사를 보면 버키가 살인에 대한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의문이 듭니다. 시빌 워가 시작하면서 그는 이미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상태이고 스티브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티브를 찾아가서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또한 목숨에 대한 위협을 받기는 했으나 스티브가 막지 않았다면 다시 살인을 저지르려 했으며, 토니를 상대로 참회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스티브와 협공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가 과거의 행동에 완벽히 책임이 없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3. 복수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요즘 네이버 웹툰 중에서 '비질란테'라는 웹툰이 인기입니다. 법이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하지 못한 범죄자들에게 정의로운 주인공이 죗값을 치르게 한다는 내용의 웹툰인데요, 이것이 이슈가 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현재 한국의 법체계가 제대로 정의를 행사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죠. 어찌 보면 잔인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항상 정당한 대가를 원합니다. 또한 이 명제는 국가 내에서는 사회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서 금지되어 있지만, 국제법에서는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법인만큼 비현실적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대 법체계에서는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을 막기 위해 개인이 개인에게 복수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죠. 이로 인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사회에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정의 사이의 괴리가 발생하고, 사람들 간의 갈등이 발생합니다.

 

시빌 워에서는 3가지의 복수가 나타납니다. ‘제모의 복수’, ‘토니의 복수’, ‘트찰라의 복수가 그것이죠.

 

제모의 복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당연히 정당하지 못합니다. 그는 소코비아의 전투로 인해 가족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고한 희생자들의 복수를 위해 무고한 희생자를 새롭게 만들어내죠.

 

영화 초반부에 소코비아에서 죽은 아들로 인한 원망을 토니에게 쏟아내는 어머니가 나옵니다. 그리고 토니는 그녀의 원망을 듣고 소코비아 협정에 찬성하게 됩니다. 토니는 소코비아에서 선의를 위해 행동했으나, 그의 행동으로 인해 사람이 죽었죠. 그가 행동하지 않았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지만, 토니는 변명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제모의 원한도 보통 사람들의 원망처럼 정당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행동은 정당하지 못 했습니다.

 

토니의 복수는 사실 복수의 정당성 문제까지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복수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HISHE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시빌 워를 다룬 동영상에서 나온 것처럼 버키가 토니에게 그의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다면 토니가 버키에게 끝까지 피의 복수를 고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정의의 편인 아이언맨이고 항상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면서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참된 선의를 가진 인간입니다. 그런 그가 버키가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저지른 살인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봤다면 계속해서 버키를 증오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2:1로 잘 싸우는 것처럼 나옵니다만, 사실 토니가 처음부터 제대로 마음먹었다면 버키는 바로 죽었겠죠.

 

-째려보는 게 아니라 바로 토니에게 자신의 심정을 말했어야 한다-

트찰라의 복수에서는 영화가 복수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트찰라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블랙 팬서'로서 윈터 솔저에게 책임을 물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는 복수에 함몰되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버키에게 달려들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을 절제합니다. 그리고 제모의 모습에서 복수의 잘못됨과 허무함을 본 트찰라는 복수의 연쇄를 자신의 손으로 끊고, 심지어 제모의 자살마저 막는 대담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복수란 것은 상대는 물론 자신마저 파멸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것을 트찰라는 깨달은 것입니다.

 

-복수의 늪에 삼켜진 제모와 늪에서 벗어난 트찰라-

4.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정당한가?

 

시빌 워에는 계속해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를 희생하지 않으면 가 희생되는 경우가 있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를 희생하는 경우를 선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라는 것은 그 가치의 경중을 따질 필요가 있는데, 그 가치는 누가 평가할 수 있을까요?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한 명을 구할지, 다섯 명을 구할지를 고민하는 트롤리 딜레마에 대해 논합니다. 여기서 나온 결과를 보면 우리는 가치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 가치는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인피니티 워에서 캡틴도 비슷한 의미의 말을 합니다. 비전이 타노스를 저지하기 위해 희생하려 하자 캡틴은 생명을 저울질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마블 영화들은 결국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말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희생당한 소수의 원망은 무조건 정당한 것일까요? ‘를 희생하더라도 를 구해야 했다는 이기적인 외침일 뿐은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입니다.

 

여담) 왜 제목이 '캡틴 아메리카'인가?

 

개인적으로는 왜 이 영화의 메인 제목이 '캡틴 아메리카'인가 싶습니다. 영화가 캡틴 트릴로지의 마지막 영화인만큼 제목에 캡틴이 주가 되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영화의 내용상 히어로들 간의 생각의 차이로 인한 대립과 캡틴과 아이언맨의 대립이 주 내용이 되는 만큼 '시빌 워'가 더 적절한 제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스티브와 버키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영화의 내용이 전개되는 것은 맞지만, 영화에서 오히려 토니의 감정에 더 많이 공감을 했기 때문에 캡틴의 단독 영화처럼 이름이 붙는 것이 많이 어색하다고 생각되네요.

 

-로다주의 열연-

또한 스티브가 중점으로 두는 가치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의 행동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주인공인 영화의 제목이 더욱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평점 ●●●◐○

 

관객은 기본적으로 히어로 장르의 영화를 볼 때 오락성을 기대하고 보는데, 시빌워는 그에 있어서 충분히 관객을 만족시킵니다. 특히 히어로들 간의 격투씬을 보면 합이 아주 정교하고 보는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을 장면의 소모품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관객이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배우들의 열연도 돋보입니다. 하지만 히어로 장르의 영화임에도 여러 철학적 주제를 관객에게 생각해보도록 제시한다는 장점이, 오히려 너무 많은 주제를 제시하여 관객이 영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게 만들며 영화에 집중하기 힘들게 만든다는 단점으로 변한다는 부분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