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제시

2020. 9. 15. 15:03잡담

MMORPG류의 온라인 게임을 한 경험이 있다면, '선제시'라는 개념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할 것입니다.

'선제시'란 일반적으로 게임에서 아이템 등을 판매하려는 사람이 그 아이템을 구매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특정 가격을 명시하지 않고 구매자가 원하는 가격을 먼저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경우 거래 이전에 판매자는 아이템에 대해 미리 생각해 둔 가격이 있기 때문에 구매자가 그 가격 이하의 금액을 부르면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판매자도 물건을 팔면서 손해를 볼 수는 없겠지만, 정상적인 거래 방식 하에서는 판매자가 원하는 가격을 먼저 제시하고 그 가격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구매자가 등장해 거래가 성사되는 것이 일반적이죠.

하지만 선제시의 경우에는 판매자는 자신이 원하는 가격은 공개하지 않으면서 구매자가 제시하는 가격을 마냥 거절할 뿐이기 때문에 구매자 입장에서는 어떻게 거래를 성사시킬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따름입니다.

간혹 선제시를 요구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가격을 공개하는 판매자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도 대개 가격 흥정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판매자는 자신이 원하는 가격 밑으로는 물건을 팔지 않기 때문에 선제시 자체가 의미가 없는 행동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선제시의 목적은 대체 뭘까요? 그것은 바로 시세를 잘 모르는 호구를 잡아서 이득을 취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혹시 정말 시세를 몰라서 선제시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귀차니즘이 심하거나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닌 이상 자신이 가진 비싼 물건을 가격도 알아보지 않고 파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또한 공급이 거의 없는 물건을 가지고 있는 판매자가 갑이므로 얼마든지 선제시를 요구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는 것 같은데, 이런 경우에도 어차피 본인이 원하는 가격 밑으로는 물건을 팔지 않을 것이므로 그냥 본인이 원하는 가격을 먼저 말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점에서 선제시를 옹호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 이런 선제시와 비슷한 경우를 생각해보자면, 소위 '용팔이'하면 생각나는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정도가 있겠는데요, 그나마 그런 경우에도 흥정을 통해 가격을 조정할 수는 있지만, 게임에서의 선제시는 흥정조차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이 선제시라는 행위가 게임 세상에서만 볼 수 있고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현실에서도 쉽게 중고거래 사이트 같은 경우에서 제시충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즘 제가 짜증나는 것은, 게임 광고를 의뢰하면서 본인들이 먼저 견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제게 얼마 정도의 견적을 원하냐고 물어보고는, 제가 그들이 원하는 가격을 부르지 않으면 바로 연락을 끊는 경우입니다.

이런 선제시에 지쳐서 그냥 견적을 그쪽에서 먼저 달라고 해도 바로 잠수를 타는데요, 안 하면 그냥 안 하면 되는 거지만, 카톡 하나 보낼 때도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숙고하면서 보내는 제 입장에서는 이렇게 갑자기 잠수를 탈 때마다 참 짜증이 납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본 상태에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 건지, 네티켓이 없는 사람이 참 많네요.

생각해 보면, 먼저 거래를 요청해놓고서는 먼저 연락을 끊는다는 점에서 게임 속에서의 선제시보다 더 악질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게임 속 인간 군상의 다양하며 극단적이기까지 한 모습은 사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라는 점을 실제로 느낄 때마다 매번 감탄하고 있다는 그런 얘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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