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29. 21:02ㆍ게임/고찰
'창조적 오독'이란 그림이나 조각상과 같은 미술품 또는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 등의 창작물에 대해 시청자(or 독자)가 창작자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관객이 영화의 장면을 보면서 감독이 의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그 장면을 해석하는 경우라든가,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시의 내용을 시인의 입장이 아닌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 해석하는 경우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창조적 오독은 '모더니즘(구조주의)'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후기구조주의 또는 해체주의)' 시기부터 강조된 것인데, 포스트모더니즘 중 창조적 오독의 개념이 생겨난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 포인트 중 하나가 창작자가 작품에 담아내려고 한 메시지와 그 작품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해석한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권위적이고 확실한 답을 중시하기보다는 공통된 주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담론이 이루어지는 것을 중시하는 사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혹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어떤 작품이 생산되면 그 작품은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난 것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하는데, 물론 '작가주의' 관점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전혀 동의할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을 피력합니다.
https://pgr21.com/humor/250164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영화 '싸이코'로 유명한 영화계의 거장 '히치콕'의 손녀가 히치콕과 관련한 과제를 히치콕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는데, 그 과제의 학점으로 C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가 '롤랑 바르트'는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죽음'을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기존에 작가가 작품의 의미를 독점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하나의 올바르고 객관적인 해석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던 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동일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비평(가)들이 존재할 수 있고, 비평가들이 텍스트 속에서 '놀고, 작업하고, 생산하고, 활동하는 것'에서 무수히 많은 다양한 의미들이 생산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롤랑 바르트가 작가의 관점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그가 작가의 죽음을 선언한 이후 활동한 내역을 보면 '창조적 원천으로서의 작가'의 개념은 해체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의미들이 일시적으로 고정되는 지점'으로서의 '작가성'은 존재하며, 그 위치는 작가로부터 떨어져 나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유동적 관계 속에 놓인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8603413&memberNo=30129708&navigationType=push
저는 최근 이슈가 됐던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를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한 리뷰를 보고 이 창조적 오독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한 라오어2는 그 게임이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그런 식의 해석이 정말 라오어 시리즈의 디렉터 '닐 드럭만'이 의도했던 바인지는 지금 사태의 포인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이 사태에서 중요한 것은 같은 작품에 대해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고 그래야 한다는 것을 닐 드럭만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의 작품을 비판하는 의견들을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폄하하는 것과 동시에 그 모든 사람들을 단순히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로 치부하는 듯한 발언을 이어나갔습니다.
물론 어떤 작품이 있을 때, 그것을 만든 창작자의 생각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에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한다면, 그 창작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려해야 합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이 비록 주관적이고 작가의 관점을 무시한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마다 성장하면서 겪은 환경이나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는 '자발적 오독' 즉, '자신의 생각과 다른 관점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닐 드럭만은 라오어2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작품 그 자체를 통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고 했다고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는데요, 이것은 결과물 그 자체로만이 아니라 의도로 평가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작품성이 아니라 의도로 판단 받고자 했던 창작물들이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동안의 사례들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보니, 게임 고찰과는 많이 상관없는 글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요즘 게임계의 주요 이슈를 다뤘기에 '게임(과 관련된 사건에 대한) 고찰'이라고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글에서 주요하게 다룬 '창조적 오독'은 사실 학문적으로 정의된 단어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사용되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단어, 그러니까 일종의 신조어로 생각이 되네요. 그렇기에 이 단어보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창조적 오독이라는 단어가 창작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작품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폄하되지 않고, 같은 주제에 대해 사람들마다 창조적인 해석을 통해 보다 나은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좋은 단어라고 생각해서 가져와봤습니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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